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는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측면에서 극심한 혼란과 재정비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지배 하에서 겪은 역사적 트라우마는 국가 정체성은 물론 예술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음악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며, 작곡가들은 과거의 낭만주의 전통과 현대적 실험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안톤 베베른(Anton Webern)의 사후, 그의 12음 기법은 오스트리아 음악계에 깊은 영향을 남겼으며, 이를 계승하고 확장한 작곡가 프리드리히 체르하(Friedrich Cerha)는 전후 오스트리아 현대음악의 대표 주자로 떠올랐습니다. 이 글에서는 베베른의 유산과 체르하의 실험정신을 중심으로 전후 오스트리아 음악이 어떻게 혼란과 회복, 사색의 과정을 예술로 승화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안톤 베베른의 12음 기법과 전후 음악의 지향점
안톤 베베른(1883–1945)은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와 함께 12음 기법의 창시자로, 제2 빈 악파의 일원으로 활약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짧고 밀도 높은 구성, 극도의 절제와 정제된 음향으로 특징지어지며, 감정 표현보다는 구조적 완결성과 음렬의 질서에 집중했습니다. 베베른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성과 멜로디를 해체하고, 음과 음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음악적 언어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1945년 미군 병사에 의해 우발적으로 사망했지만, 그의 음악적 유산은 전후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걸쳐 20세기 중반 현대음악의 지형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46년 이후 오스트리아 음악계는 베베른의 작품을 재평가하는 움직임과 함께, 12음 기법을 보다 자유롭게 응용하고자 하는 작곡가들의 실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베베른의 음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이자 예술적 선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전후 오스트리아가 잃어버린 정체성과 질서를 예술 속에서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그의 작품은 전후 음악인들에게 단순한 기법의 전달을 넘어서, 새로운 시대의 예술가로서 가져야 할 태도와 정신을 상징하는 지표가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체르하와 오스트리아 실험음악의 재건
프리드리히 체르하(Friedrich Cerha, 1926–2023)는 안톤 베베른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전후 오스트리아 사회의 복합적 정서를 반영하는 새로운 음악 세계를 구축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1950년대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후기 표현주의와 세리얼리즘, 전자음악, 구체음악 등 다양한 현대 음악 기법을 오스트리아 음악에 도입했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베베른과 쇤베르크의 12음 구조를 기초로 하되, 보다 유연한 구성과 음향 실험을 통해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했습니다.
체르하의 대표작 ‘Spiegel(거울들, 1960–61)’ 연작은 오스트리아 실험음악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7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대규모 관현악과 전자음향, 확장된 연주기법이 총동원된 대작입니다. ‘Spiegel’은 음향 그 자체를 탐색의 대상으로 삼으며, 음악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확장하는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이는 전쟁 이후의 공허함, 정체성의 붕괴, 언어의 무력함을 예술적으로 대응하려는 시도이자, 음악을 통해 새로운 존재론적 의미를 모색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또한 체류하는 알반 베르크의 미완성 오페라 ‘룰루(Lulu)’의 완성 작업을 맡아 1979년에 전곡을 발표함으로써, 제2 빈 악파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활동은 단순한 작곡을 넘어, 오스트리아 음악계의 이론적, 실천적 지평을 넓히는 작업으로 이어졌으며, 그는 평생에 걸쳐 음악 교육과 현대음악 진흥에 헌신했습니다.
전후 오스트리아 음악의 철학적 의미와 국제적 의의
1946년 이후 오스트리아 음악은 단순한 양식적 변화가 아닌,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예술로 변화했습니다. 베베른의 구조적 절제, 체르하의 철학적 실험은 전후 사회가 겪은 파괴와 재건의 과정을 음악으로 해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소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인간성, 흔들리는 정체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음악이라는 비언어적 예술로 환원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내면적 갈망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19세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중심지였지만,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전위음악과 실험예술의 중심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취향의 변화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전환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전후 오스트리아 음악은 단절과 연속, 혼돈과 질서 사이에서 새로운 예술 어법을 통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다시 구성하려는 시도였으며, 이는 국제 현대음악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1946년 이후 오스트리아 음악계는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언어의 창조라는 이중 과제를 동시에 수행했습니다. 안톤 베베른은 절제와 구조 속에서 새로운 음악 철학을 제시했고, 프리드리히 체류하는 그 철학을 바탕으로 전후 시대의 불안과 사색을 음악으로 풀어냈습니다. 이들의 작업은 단지 오스트리아만의 유산이 아니라, 전후 유럽 전체가 공유한 예술적 질문과 대답의 일부였으며, 오늘날에도 그 철학적 깊이와 예술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