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6년, 리투아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강제 병합되며 극심한 정치적 억압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예술, 특히 음악은 단순한 문화 표현을 넘어 민족의 정체성과 신앙, 그리고 저항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이 시기 리투아니아 음악계에서 주목받은 인물 중 하나가 작곡가 페트라스 칼파우스카스(Petras Kalpaukskas)입니다. 그는 전통 종교 음악과 민속 선율을 현대 작곡 기법과 융합해 리투아니아인의 감성과 의지를 관현악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대표작 ‘빛의 언덕(Kalno Šviesa)’은 단순한 예술작품을 넘어, 억압받는 민족의 영혼을 울리는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받습니다.
리투아니아의 1946년 – 억압 속 민족예술의 분출
1946년 당시 리투아니아는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일부가 되었고, 모든 정치적·종교적 표현은 검열과 억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음악은 직접적인 저항 대신 은유와 상징을 통해 민족적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창구로 기능했습니다. 공공 언론과 문학이 철저히 통제된 반면, 음악은 멜로디와 화성의 언어로 간접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은 음악을 통한 문화적 저항을 시도하게 됩니다.
특히 리투아니아는 가톨릭 신앙이 민족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 종교음악이 민족음악으로서의 상징성을 지녔고, 작곡가들 역시 이러한 특성을 살려 음악적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파우스카스의 등장은 단순한 창작자의 등장이 아닌, 민족 서사의 음악적 부활을 의미했습니다.
페트라스 칼파우스카스 – 음악으로 그린 민족과 신앙의 결합
페트라스 칼파우스카스는 1910년 리투아니아 북부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교회 음악과 민속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는 전통 리투아니아 선율의 구조적 특성과 유럽 근대 음악의 형식미를 결합한 작곡 스타일로 빠르게 주목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대부분 리투아니아의 역사적 기억, 기독교적 상징, 민속적 자연 이미지가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특징은 1946년에 발표한 ‘빛의 언덕(Kalno Šviesa)’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이 작품은 그가 소련 체제하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리투아니아인의 정체성과 희망을 음악으로 기록하고자 했던 의지를 보여줍니다. 작품은 전통 성가 선율을 바탕으로 한 혼성합창, 관현악, 타악기의 교차 구조로 구성되며, 3악장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악장은 순례, 고난, 구원의 상징적 서사를 담고 있어 종교적 동시에 민족적인 서사 구조를 형성합니다.
빛의 언덕(Kalno Šviesa)의 음악적 구조와 메시지
‘빛의 언덕’은 종교적 신앙과 민속적 감성을 결합한 대규모 관현악 작품으로, 리투아니아 음악사에서 민족주의 음악의 정점으로 평가됩니다.
- 제1악장 ‘어둠 속의 행진’: 저음 현악기와 팀파니의 어두운 음색으로 시작되며, 민속 선율을 변형한 긴장감 있는 테마가 등장합니다. 이는 당시 리투아니아의 정치적 억압 상황을 상징합니다. 중반부에서는 남성 합창이 등장해 절제된 음정 속에서도 강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 제2악장 ‘기도와 빛’: 혼성합창이 중심이 되는 악장으로, 리투아니아 전통 종교 선율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악장은 단순한 찬가 형식을 넘어서 다성분 구성과 대위법적 진행을 통해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합니다. 특히 여성 합창의 클라이맥스에서는 리투아니아 전통 축제 노래의 멜로디가 삽입되어, 민속성과 종교성이 절묘하게 연결됩니다.
- 제3악장 ‘언덕 위의 찬란함’: 밝고 개방된 조성으로 전환되며,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브라스 섹션과 관현악 전체가 민속 선율을 환희의 코드로 재해석하면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 마지막 악장은 단순한 승리의 노래가 아니라, 언젠가 자유를 되찾을 리투아니아의 미래를 예고하는 희망의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이 곡은 당시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교회 및 지역 공연장에서 제한적으로 연주되었으며, 공식 발표는 1950년대 중반 이후 해외 리투아니아 망명 커뮤니티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이 갖는 상징성은 매우 컸고 지금까지도 리투아니아 음악사에서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 예술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결론: 침묵의 시대, 음악은 말하고 있었다
‘빛의 언덕’을 통해 페트라스 칼파우스카스는 단순히 아름다운 음악을 남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당시 리투아니아인의 억눌린 정체성과 신앙, 그리고 저항의 감정을 멜로디와 화성으로 구체화했으며, 이는 수많은 청중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했습니다.
1946년의 리투아니아는 말할 수 없었지만, 음악은 말할 수 있었습니다. 칼파우스카스의 음악은 바로 그 침묵 속에서 외친 가장 진실한 목소리였으며, 오늘날에도 리투아니아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예술적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